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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투명우산 본문

좁고

[국민] 투명우산

문엔 2017. 6. 25. 05:32

 

 

 

 

 

 

 

 

 

 

 

 

 

 

 

 

106차 국민전력 우리 무슨 사이야?’, ‘장마로 참여합니다.

 

 

 

 

 

 

 

 

 

 

 

 

 

 

 

 

 

 

 

 

 

 

 

 

 

 

 

 

우리, 습관이 아닐 리 없다.

 

 

 

 

 

 

 

 

 

 

 

비가 주륵주륵 잘도 내린다. 여름도 아닌데, 이게 며칠 째더라.

뉴스에서 이번 장마는 귀한 단비라고 그러던데 바닥에 고여 있는 뿌연 물웅덩이는 누가 봐도 쓰디쓴 색이다. 저 웅덩이는 며칠째 저기에 고여 있을까.

 

 

딸랑.

 

 

경쾌한 소리를 내며 카페 문이 열렸다.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가 다시 줄어든다. 젖은 발소리가 다가와 풀썩 앞자리에 앉는다. 테이블 옆에 우산을 기대두는 데 탁'하고 쓰러지고만다. 그제야 정국은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지민은 쓰러진 우산을 세울 생각도 안했다.

 

 

약속시간 좀 지켜.”

미안.”

 

 

최근 몇 주간 지민은 제 시간에 나타나는 법이 없었다. 개강해서 바쁘다고 하지만, sns를 보면 진짜 바쁜 건 연애 쪽이었다. 지민이 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냈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정국의 문제집 맞은편으로 지민의 것이 놓인다. 이번엔 펜을 찾아 가방을 한참 뒤진다. 모든 동작이 느리고 여유 있었지만 정국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보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문득 셔츠가 목에 들러붙는 듯한 기분에 느슨하게 매고 있던 교복타이를 아예 풀어버렸다.

 

 

정국아.”

 

 

지민이 부르면 수업이 시작된다. 별로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는 과외를 시작한지 세 달 남짓이다. 4년째 알아오는 지민과 정국은 지루해질 때쯤이면 자신들의 관계를 새로 정립했다. 정국은, 내년에 지민과 선후배로 새롭게 관계를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지긋지긋하다, 진짜.”

 

 

카페 문을 열고나오며 형이 우산을 펼쳤다. 사소한 일에도 잘 투덜대는 게 꼭 아이 같다. 나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형의 우산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른 손에는 아까 카페 입구에서 봉지에 넣어둔 3단 우산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 좁아. 덩치도 큰 게.”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우산을 뺏어들었다. 형은 쉽게 넘겨주었다.

거의 일주일 째 계속되는 비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우중충하다. , 맑은 날이라고 사람들 표정이 좋았나 싶지만. 유난히 춥지 않은 겨울의 초입이었다. 기상캐스터 누나는 최근 가뭄이 심했던 지역의 해갈을 위해서는 비가 더 내려야 한다고 이야기 했지만, 며칠 째 계속되는 습한 기운은 확실히 사람을 지치게 했다.

 

 

날씨 좋은 나라로 여행가고 싶다. 중간고사 날 태풍이나 와라.”

 

 

이 투덜쟁이를 빼놓고라도.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휴대폰을 보느라 정신이 팔렸는지 형은 못들은 것 같았다. 오른쪽 어깨가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오늘 같이 꽤 굵은 비가 내리는 날, 편의점에서 파는 투명우산은 남자 혼자쓰기에도 영 작다. 새로 사라고 잔소리를 해도 언제든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싸구려 우산이 좋다고 했다. 형은 변덕이 심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이따금 아주 사소한 것에선 한 가지만 고집했다. 예를 들면 립밤은 복숭아향만 썼다. 버스에 앉을 때, 창가자리에 앉지 못 할 거면 그냥 서서 갔다.

 

 

전정국. 우리 사나이들끼리 여행 한 번 안 갈래?”

지금 수능이 코앞인 사람한테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뭐 어때. 이럴 때일수록 머리를 식혀줘야 돼.”

형이 나 먹여살려줄 거면 가고. 나 사실 취장이 목표야. 돈 많은 집에 장가가는 거.”

꼭 우리 학교에 합격 시켜 줄게.”

. 나정도면 괜찮지 않나? 라면도 잘 끓이고 잘생겼잖아.”

어쩌냐. 형은 임자가 있는데.”

그러니까. 그 누나도 눈이 삐었지.”

 

 

그 외에도 많다. 내가 꽤 오랜 시간 곁에 머물러서 알아낼 수 있었던 것들. 다른 사람이 잘 모르는 형을 수집하는 것. 그런 점들이 못 견디게 귀엽다. , 또 생각해버렸네.

형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공격했다. ‘소리가 절로 났다.

 

 

됐다. 우리 예진이랑 가야지.”

 

 

나는 실소를 흘렸다. ‘우리 예진이누나 집이 엄해서 여행도 못 간다고 하소연 한 게 엊그제였다.

나는 우산을 좀 더 형 쪽으로 밀었다. 좁아터진 우산 속에 비 냄새가 가득했다.

어쩌면 이 우산이랑 난 처지가 비슷하다. 형이 고집하고 있는 사소한 지점. 하지만 그 이유는 언제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물건이여서. 사실 나는 형이 이 우산을 고집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을 나설 때 늘 집 문 앞에 세워져 있을 싸구려 우산. 형은 그냥 들고 나오는 걸 거다. 습관적으로. 비가 그치면 그대로 길거리에 버리고 가버릴까? 아니면 형네 집 신발장 근처에서 먼지 쌓인 채로 잊혀져갈까. 어떻게 생각해도 나와 비슷하다. 한낱 날씨에 운명을 달리하는 우산처럼, 나는 형의 변덕에 온몸으로 나를 맡긴다.

 

 

 

 

 

 

 

 

 

 

 

투명우산 

 

 

w. 문엔

 

 

 

 

 

 

 

 

 

 

 

 

 

형에게 사소한 습관이 나라면, 형은 나의 일상을 뒤덮는 습관이다.

 

우리는 PC방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열여섯이고 형은 열여덟일 때.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동네 PC방에 가면 늘 형이 보였다. 나는 거의 매일 가다시피 했고, 형도 그랬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런 애들 투성이었다. 그런데도 형은 유독 눈에 띄었다. 가끔 형 근처를 지나치면서 저 형 만날 오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형은 6시 반만 되면 칼같이 PC방을 나섰다. 나는 그런 형이 신기했다. 학교 마치자마자 온 나는 오늘은 조금만 하고 가야지, 생각하다가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8-9시까지 있곤 했다. 그치만 나에겐 함께 시간을 낭비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별로 좌절하진 않았다. 그냥 형이 좀 신기했을 뿐이다. 끝나고 바로 학원에 가는 건지 PC방을 나서는 형의 가방은 항상 엄청 빵빵했다.

하루는 몸이 안 좋아서 끙끙대며 게임을 하다가 먼저 집에 가야겠다고 일어났다. 친구들은 게임에 정신이 팔려서 괜찮냐고 몇 번 물어보고는 얼른 들어가라며 보내버렸다. 속이 너무 안 좋은데, 오늘 돈가스 때문에 급식을 너무 많이 먹었나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런데 건물 입구에 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629분이었다. 다시 형을 봤다. 가만히 서있는 모습은 처음 봤다. 나보다 키는 좀 더 컸지만 자그마한 어깨가 빵빵한 가방을 감당하기 힘겨워보였다. 왜 저러고 있나 했더니,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젠장. 뭔 비야. 속 울렁거려 죽겠는데. 형의 옆에 가서 섰다. 형이 잠시 날 봤다가 다시 밖을 봤다. 그냥 내리는 정도가 아니라 폭우에 가까워서 맞을 만한 비도 아니었다. 잠시 기다려보자고 생각했다. 조금 약해지면 뛰어가야지. 옆을 힐끗 보니 형은 안달 난 표정으로 이따금 발을 동동 굴렀다. 엄지손가락 끝을 입에 물고 건물 안쪽을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형의 행동을 신경 쓰고 있자니 점점 멀미가 나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좀 있지.’ 그리고 내 속은 점점 뒤틀려갔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형이 날 쳐다봤다. 나는 미간을 구긴 채 형을 봤고, 잠시 눈이 마주쳤다.

 

 

우웨엑

 

 

그대로 형을 붙잡고 토를 갈겼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넘어오는 순간에 몸에 반동 같은 게 일어나면서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나는 수치스럽고 미안하고, 속은 계속 울렁거려서 딱 죽을 거 같았다. 형 앞에 주저앉으며 계속 헛구역질을 했다. 사과해야하는데, 볼 낯도, 정신도 없었다.

 

 

괜찮아요?!”

 

 

형이 다가와서 내 등을 쓸었다. 눈물이 왈칵 났다.

 

 

, 병원 좀.”

 

 

내가 구역질하는 사이로 말하자, 형은 잠시 혼란스러워하더니 가방을 내팽개쳤다. 등을 보이며 쪼그려 앉아 내 팔을 들어 자기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팔을 꽉 잡고 휙 들쳐 맸다. 나는 남은 기력을 다해 형 등에 업혔다. 형이 끙소리를 내며 힘겹게 일어나더니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난 그 와중에 형이 졸라 멋있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놔버렸다.

 

 

정신이 들었을 땐 병원 응급실이었다. 옆에 앉아있던 엄마는 눈 뜬 나를 보자마자 엄청 때렸다. 급체였다. 유난히 맛이 좋던 돈가스가 문제는 문제였다.

 

 

음식을 씹어서 삼켜야할 거 아니야!”

, 아퍼! 엄마가 형이랑 나랑 차별해서 내가 식탐이 많아진 거잖아!”

그래 너 잘났다. 잘났어!”

, 나 환자라고!”

 

 

한참을 때리더니 분이 풀렸는지 씩씩대며 의자에 앉은 엄마가 가방에서 내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당장 전화해.”

전화? 어디다가?”

너 여기까지 데려다 준 애! 번호 저장해놨으니까 전화 해.”

?”

 

 

그제야 내가 병원까지 어떻게 왔는지 떠올렸다. 기절을 했으면 필름이 완전히 끊겼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형의 어깨에 여러 번 토를 했던 게 생각이 났다. 형은 자꾸 미끄러지는 나를 몇 번이나 고쳐 업으며 힘겹게 병원까지 뛰어갔다.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는데. 어렴풋이 미친!’하고 소리를 지르던 형의 턱도 생각났다. 죽자. 죽어버리자. PC방 다시는 안 간다.

 

 

엄마가 해.”

전정국. 너 내가 공부는 못해도 인성 제대로 박혀있어야 한다고 했어, 안했어!”

안 해. 쪽팔린다고!”

쪽팔리는 건 아냐? 쪽팔리는 건 아는 녀석이 사람 등에다가……!”

 

 

등짝에 불이 붙은 것처럼 빨개진 후에야 엄마는 때리는 걸 멈췄다. 결국 전화를 해서 사과도 하고 감사도 했다. 형은 어색하게 전화를 받고, 와중에 진짜 괜찮은 거냐고 걱정도 해줬다. 내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엄마가 전화를 뺏어 과하게 하이톤의 목소리로 형을 집에 초대했다. 나는 제발 오버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따듯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고 무조건 오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망연자실 했다. 어머니 저에게 수치심을 가르치시려는 거라면 이미 알만큼 알아요.

내가 엄마 때매 미쳐 돌아가든 말든, 그 다음 주 일요일에 정말 형은 우리 집에 왔다.

 

 

, 형 진짜 왔어요? 엄마 말 무시하지.”

 

 

문을 열고 처음 건넨 말이 그거였다. 형 등에 토를 해대고 나서 처음 본 얼굴에 놀라서 아무 말이나 툭 나갔다. 이상하다. 분명 마음을 다 잡고 열었는데. 형은 묵직한 주스박스를 양손으로 들고 진짜 못 올 데 온 사람처럼 멋쩍게 웃었다.

 

 

안녕.”

 

 

뒤통수로 날아드는 엄마의 고무장갑에 맞고 문을 활짝 열어 형을 안으로 들였다. 엄마는 얌전을 떠는 형을 착하다며 좋아했다. 나랑 친형을 머리 검은 짐승이라고 칭하면서, 지민형은 귀엽다고 좋아했다. 확실히 그 시절 형은 지금보다 훨씬 얌전했다. 엄마는 형의 손을 꼭 잡고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해댔다. 부모님께도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으니 전화번호 좀 알려달라고 수선을 떠는 통에 난 쪽팔려 사망을 경험했다. 형은 엄마의 환대에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그 주책을 잘 받아줬다. 어찌어찌 밥을 먹고 엄마는 형과 이야기를 나누라며 내 방에 우리를 집어넣었다. 밥 먹으며 형이 공부도 잘 한다는 사실을 캐내고는 내가 형과 친해질 계략을 꾸민 거였다. 마녀다 마녀.

 

 

형이랑 방을 쓰나봐.”

 

 

이층 침대와 두 개의 책상이 놓인 걸 보고 형이 말했다.

 

 

. 저 이층 침대 13살 때부터 쓰던 건데. 우리 형은 발이 침대 밖으로 나오거든요.”

정말? 대박.”

형이 계속 바꿔달라고 하는데, 엄마는 계속 좀만 기다리래요.”

너는? 너도 발 나와?”

저도 곧 나올 걸요. 그 전엔 바꾸겠죠, .”

웃기다. 너네 집 재밌는 거 같아.”

……엄마가 오바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좀 민망하긴 했는데, 난 형제도 없고 집에 혼자 있을 때가 많아서. 이런 거 좋아.”

 

 

그러고는 아까 문 앞에서처럼 웃는데 그때 처음 생각했던 것 같다. 예쁘다고.

 

 

암튼, 그날은 정말 감사했…….”

 

 

벌컥

 

 

지민아, 사과 먹어! 무지 달다.”

 

 

나름 용기를 쥐어짜서 말하는데 엄마가 정말 교양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하면서 침대에 눌러 앉았다. , 제발.

 

 

형제 갖고 싶었으면, 정국이 동생 삼으면 되겠네! 생명의 은인인데 이런 인연도 없지 않니? 얘가 좀 꼴통이긴 해도 나쁜 앤 아니야. 시간 될 때 공부도 좀 봐주고.”

 

 

급채에 웬 생명의 은인? 열심히 아들을 까내리며 형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인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형은 참 해맑게 웃었다. 저런 건 어디서 배우는 걸까.

 

 

저야 좋죠. 정국이 귀여워요.”

 

 

언제 봤다고 귀엽다는 건지. 자기 등에 토한 사람이 귀여워 보일 수 있나?

형을 배웅하면서 엄마는 그날 했던 음식들을 한상 차림 하듯 담아줬다. 부모님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드리라고 하며 직접 통화하지 못하는 걸 아쉬워했다. 그리곤 내 등을 떠밀어 형네 집까지 들어다주라고 했다. 괜찮다고 한사코 거절하는 형에 아랑곳 않고 엄마는 나를 엘리베이터에 넣어버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형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김여사의 억센 성미는 오늘 완전 개그 자체였다. 나도 그냥 픽 웃어버렸다. 웃음이 잦아들자 형은 내 손에서 쇼핑백을 뺏어들었다.

 

 

그러지 말고 좀 들어다 줄게요. 무거워요.”

안 무거워. 바로 타고 올라가.”

지금 올라가면 엄마한테 또 맞을 텐데.”

내가 일이 있어서 급하게 갔다고 해.”

 

 

믿어 주겠냐고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정국아 오늘 고마워. 자주 보자.”

 

 

형이 미련 없이 내리고 문이 닫혔다. 나는 내 손을 들여다봤다. 아까 형이 쇼핑백을 뺏어가면서 닿았던 부분이 화끈 거리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걸 잊고 잠시 서있었다. 이건 뭘까.

냄새나는 친구놈들 사이에서 본적 없는 타입의 형이 신기하면서도 끌렸다. 사근사근한 말투 때문이었을까. 형이 떠난 내 방에서 나던 복숭아 향 때문이었을까. 웃는 얼굴 때문이었나. 이제와선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만나면 만날수록 자꾸 귀엽다고 생각해버리는 수많은 순간들이 쌓여갔다. 2면 전정우보다 형이라고……귀엽다니. 전정국 돌았냐.

실제로 우린 자주 봤다. PC방에서 만나서 게임을 하기도 하고, 이따금 형네 학교 앞에서 우연을 가장해 만나기도 했다. 그런 날은 분식으로 끼니를 챙기고 PC방 대신 오락실을 가거나 노래방을 가기도 했다. 맥날에서 감자튀김이나 씹으면서 수다를 떨기도 했다. 함께 있으면 별거 안 해도 재밌었다. 그리고 630. 형이 학원에 가버리고 나면 나는 가출 청소년처럼 한참이나 시내를 빙빙 돌아야 했다.

원래 중3은 나에게 가장 신나는 시기였다. ‘야자충 되기 전에 실컷 놀아버리자가 나의 구호였다.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의 등에 토를 한 그날부터, 내 아까운 중3 생활에 그늘이 드리웠다. 마치 큰 시련이 닥친 듯 했다. 비유하자면, 내 레벨로 깰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아니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현질을 해도 안 된다. 박지민을 좋아한다는 건, 나에게 그런 일이였다.

 

 

 

 

 

 

 

 

 

4. 우린 변했다. 형은 좀 철이 없어졌다. 더불어 뻔뻔해지기도 했다. 대학에 가더니 저런다. 새내기 때 특유의 싹싹한 성격으로 선배들에게 예쁨깨나 받은 모양인데 그게 사람을 망쳐 놨다. 헌내기 된지가 언젠데. 후배들에게 관심을 뺏기고 나니 자꾸 나만 보면 투정을 부린다. 3한테 투정 부리고 이거 저거 해달라고 부려먹는다. 말이 되는 거야? 덕분에 내 사춘기는 태풍의 눈처럼 지나갔다. 이따금 발을 잘 못 디디면 태풍에 휩쓸려 빙글빙글 돌긴 했지만, 형이 나를 다시 가운데에 끌어다 놨다. 사실 태풍이 박지민이었으니까. ‘네 맘대로 해라하고 내버려뒀다.

수없이 휩쓸리고 돌아오고를 반복하다보니 난 좀 단단해졌다. 그리고 엄마 같아 졌다. 오죽하면 형을 좋아하는 엄마도 형 집으로 반찬을 실어 나르는 나를 보며 니가 지민이 엄마냐고한 소리 했다. 우리 집에서 밥을 먹다가 형의 입가에 흐른 케첩을 엄지로 닦아서 내 입에 가져가는 걸 보고 친형이 물을 뱉은 적도 있다. 나는 내가 엄마를 닮아서 그렇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형도 그냥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스킨십이 자연스럽게 되기까지 내가 얼마나 신중하게 형에게 다가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없어야 한다.

아무래도 형은 사춘기가 늦게 온 것 같았다. 부모님이 바쁘셔서 어려서부터 외로움이 많다더니,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연애를 했다. OT에서 고백을 받아 사귀기 시작한 동기를 시작으로 거의 공백기 없이 CC를 했다. 그런데 늘 그렇게 오래가진 못했다. 이번에 만나는 예진이 누나가 네 번째였다. 입학하고 1년 반 만에 네 명이라니 대단한 건지, 미친 건지. 카사노바로 소문은 안 났나 모르겠다. 더러 형의 여자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오다가다 만나기도 하고 형이 소개를 해주기도 했다. 다들 예쁘고 자그마했다. 그래도 이번에 만나는 예진누나는 1월부터 만났으니까 꽤 오래 만나고 있었다. 누나는 형보다 한 살 어린 후배인데 신입생 단톡방의 멘토로 있던 형에게 반해 먼저 고백했다고 했다. 가만 보면 형이 먼저 고백하는 일은 없었다.

 

얼마 전 예진이 누나도 만났다. 정국을 보면서 꼭 가지를 쳐야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더랬다. 형이 만났던 다른 여자들 보다는 조금 키가 컸다. 시원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 사람도 만나는 구나. 귀여운 여자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과외는 4월부터 시작했다. 사실 과외가 딱히 필요하진 않았다.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다. 엄마 혼자 하는 살림이라 그럴듯한 학원에 다닐 형편까진 안 되고, 형이랑 같은 대학에 가려고 인강으로 공부해온 세월이 꽤 됐다. 그래도 형은 과외를 해주겠다고 했다. 고등학교도 같이 못 다녔으니까 대학은 같이 다니면 좋겠다고 했다. 나로썬 거절 할 이유가 없었다. 지각을 하는 것 빼고는 꽤 성실하게 가르쳐주긴 했지만 대부분 아는 내용이라 가볍게 복습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형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상하게 잠이 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심장이 뛰다가 그 소리에 취해 잠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형 때문에 생긴 습관만 두 손으로 다 꼽을 수 없다.

그 습관들을 두고 가끔 만나는 친구들은 나에게 쓸데없이 매너가 좋다고 했다. 이런 건 여자한테나 하라고.

형에게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잔뜩 욱여놓고 다니느라 가방은 날로 커졌다.

형보다 커지고 싶어 시작한 농구는 박지민 외에 나의 유일한 취미이다.

형이 게임을 관뒀을 때 나도 관뒀다. 그러고 시작한 게 공부였지. 덕분에 PC방 멤버들은 나를 배신자라 불렀고, 엄마는 내 노력은 안중에도 없고 지민이 형만 찬양했다. 근데, 그게 다 맞으니까.

등등. 생각할수록 짜증나네. 형 때문이 아닌 게 없는 인생이다. 좀 많이 불쌍하네, .

 

 

우리 무슨 사이야? 오후 6:07

 

 

오늘은 알 수 없이 안달이 나서, 카페가 아닌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렸다. 이런 무서운 카톡이 올 줄 알고 그랬나. 욕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왜 갑자기 나에게 이런 시련을. 놀라서 눌러버린 카톡창의 1은 야속하게 사라졌고 40분이 지나도록 나는 손톱만 깨물었다. 아 손톱 물어뜯는 것도 형 버릇이 옮은 거다.

30분 동안 답 안한 것부터 일단 졸라 이상하겠지. 그리고 버스는 여기를 향해 달리고 있잖아. 미친.

뭐라도 쓰려던 찰나 눈앞에 버스가 섰다. 형은 내리면서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 왜 여기 있어?!”

 

 

무척 반갑게 말하는 데, 나는 뻣뻣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있었습니다.”

습니다?”

씁었어.”

뭐야.”

 

 

어디 있는 나사가 빠진 거야. 뒷목을 잡아오며 웃는데, 지금 저 그럴 기분 아니거든요. 더 말려들기 전에 형 얼굴 앞으로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이거 뭐냐?”

? , 이거. 아까 과방에서. 요즘 이런 거 보내고 반응 보는 게 유행이라며.”

……?”

근데 넌 왜 반응이 없냐. 거기서 나만 답 안 왔다고. 오글거리는 소리하면 평생 놀려 먹을라 그랬는데.”

별 거지 같은 장난이 다 있네.”

 

 

나도 모르게 씹어 말했다. 좀 많이 열 받네.

 

 

그래서 형은 생각 해봤냐. 나랑 무슨 사이인지.”

, 카톡 기다리면서 잠깐 생각해봤지.”

. 우리가 무슨 사인데?”

……말 안 할래.”

?!”

말로 어떻게 하냐!”

그럼 카톡으로 할래?”

우리 사이에 새삼 그런 게 궁금해?”

. 난 인간관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거든.”

근데 왜 친구가 나 밖에 없냐?”

……? 그건 오핸데.”

오늘 수업 태도 봐서 고민해볼게.”

.”

 

 

그날 나는 정말 성심성의껏 모르는 척, 과외선생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척을 했다. 그리고 밤에 다음과 같은 카톡을 받을 수 있었다.

 

 

하두 익숙해서 몰랐는데. 우리 사이, 생각보다 되게 애매하더라. 오후 10:54

 

 

진짜……자기 짝사랑하는 사람 괴롭히는 학원 같은 거 있나. 이 카톡 붙잡고 나는 또 34일 동안 분석해야한다. 결론은 물론, 없다.

 

 

 

 

 

 

 

 

딸랑

 

 

오늘따라 저 딸랑소리 엄청 거슬린다. 머리가 살짝 아프다.

 

 

일주일 남았냐?”

“5일 남았어. 정확히.”

미쳤나봐. 어우 떨려.”

왜 형이 더 오버야.”

마음만은 내가 너 업어 키웠어. 근데 혹시 잘 못 되도 나 너무 원망하지 말기다.”

진짜 말 한마디로 천년 원수 돼볼래?”

미안.”

 

 

예민하네. 형이 중얼댔다.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는 걸 안다. 하지만 형의 얼굴에 있는 긴장감도 거짓은 아니었다. 타인과 감정 싱크를 잘 맞추는 성격이라 형은 늘 조금 힘들어했다. 근데 문제는 그 긴장감이 나한테도 옮겨 온다고요. 우산을 펴고 빗속으로 들어서는 형을 빤히 봤다. 형은 처마 밑에 조용히 선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잘 볼 거야.”

…….”

걱정하지 마.”

 

 

잠시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다가,

풉 소리 내 웃었다.

 

 

자신감이 너무 넘치네, 재수 없게.”

 

 

내가 갑자기 너무 진지해서 웃겼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그 순간 근본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평소 같으면 나도 웃으며 넘어갔겠지. 하지만 형의 반응이 조금 달라서. 그건 진짜 나만 알 수 있는 거라서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아 그냥 수능을 앞두고 전투모드가 된 고3이라 그랬다고 치자.

나는 들고 있던 우산을 휙 던지고 형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다.

형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우산을 내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차거. 야 놀랐잖아. 너는 덩치를 좀 생각하고.”

형도 좀 젖어봐야 돼.”

?”

 

 

몸 반이 젖을 각오로 형 우산 속으로 들어오는 게 내 유일한 투정이라는 걸 좀 알아줘 봐.

 

 

나 시험 잘 보면, 뭐해주나?”

뭘 해줘. 니가 날 해주면 몰라.”

그럼 내가 뭐 하게 해줄래.”

뭔 소리야.”

우산 사줄게. 새카맣고 엄청 큰 걸로.”

필요 없는데.”

그러니까 예진이 누나랑 여행 가지마.”

 

 

. 그거구나 아까부터 신나서 하는 여행타령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했던 거야.

너 수능 끝나면 예진이랑 여행가기로 했다! 제자의 중요한 시험이 끝날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참된 스승의 자세를 봐라.

장난스럽게 너도 갈래? 묻는 것까지도 소름끼치게 열 받았다. 그냥 그땐 늘 그랬든 참아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아니야. 그전 여친들은 꼬박꼬박 집에 들여보내고 그랬잖아.

 

 

순간 깨달았다. 좋은 형동생도 동네 친구도 가족 같은 사이도 다 재미가 없었다. 스승과 제자는 말할 것도 없고. 형을 변하게 만든 대학이라는 곳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선후배같은 관계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내 곁에 형이 있거나, 없거나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관계에는 깊고 얕음이 있다. 농도가 있다. 난 더 깊고 진한 관계를 원해. 조금만 더. 조금 많이 더.

애매한 건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니까.

 

 

그러니까 이건 내 망상이지?

 

 

.”

 

 

형이 내 키스를 받아주고 있는 건. 내가 생각해도 드럽게 서툰 내 움직임에 저런 소리를 내는 건. 이따금 볼에 속눈썹이 닿는다는 건 눈을 감았다는 건가. 인공 복숭아 향이 입 안에 퍼져서 의무적으로 입술을 살짝 물어봤다.

 

 

!”

 

 

매일같이 오는 카페 앞에서 무엇 하나 가려주지 못하는 투명우산을 기울이고 이러고 있는 건. 빗소리가 억세지는 건……. 나 돌았나. 비가 너무 오래오면 사람이 미치기도 한다는데. 아 망했다.

내가 먼저 입술을 뗐다.

형의 얼굴이 새빨갰다. 평소의 귀여운 홍조와 차원이 달랐다, 진짜 어디 아파보일 정도로 목까지 빨갰다. 터질 것 같았다. 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잡고 있던 손을 놓자 형은 내 얼굴을 살피다 순간 얼굴을 굳혔다. 그대로 우산을 던지고 달아나는 형을 잡을 수 없었다.

사실 도망가야 하는 건 나인데, 형이 가줬으니까. 온통 빨간 형이 예뻤으니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이상하게도 그날이 떠올랐다. 형 등에 잔뜩 토 했을 때도 나 귀엽다고 했었잖아요.

결국 둘 다 흠뻑 젖고 말았다. 그날처럼. 그러니까 투명우산은 길에 버려질 운명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장마가 겨울에도 오나요? 이것도 지구온난화 짓이에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올해 수능 날 아침은 춥지 않은 대신 비가 많이 내리네요.

참고 버티는 일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었는데. 특히 박지민에 대해서는.

문자 사연은 여기까지 받도록 하겠습니다. 수능 끝나고 맛있게 식사 하시라고, 외식상품권 보내드릴게요.

어떻게 견뎌왔는데…….

수험생 여러분 수능 대박 나세요!

근데 뭘 위해 참았지. 대박나려고?

하나하나, 어색하거나 급하지 않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던 이유는.. ‘형이 놀랄까봐, 배신감 느낄까봐. 형은 이대로가 좋을 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내가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습관이 되려 했다. 형을 잠식하듯 소유하고 싶었다. 어느 샌가 자연스럽게 내 것이 돼있었으면 했다. 그거야 말로 망상인데. 상처 날 각오 없이 하는 사랑이 안 지루해지고 배길까.

아침 등굣길에 듣는 라디오 디제이는 지민이 형의 목소리를 닮았다. 수능 대박 나세요, 는 무슨. 수능 얘기 끝나자마자 또 주구장창 쏟아지는 짝사랑, 연애, 이별 사연들은 나를 수능 시험장이 아닌 박지민 옆으로 데려다 놨다. 물론 정신과 마음만.

 

-

 

잘 본 것 같다. 철저한 복습이 비결이다. 4년 묵은 짝사랑도 비결이다.

교문으로 다가가는 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엄마는 일하고 있고 친형은 뭐, 올 위인이 아니고. 원랜 지민이 형이 자체휴강하고 온다 했었다. 예진이랑 같이 온다고. 그 불안한 면허로 차를 렌트해서 올 거고 나를 편하게 모시고가서 고기를 사주고, 그 길로 둘은 여행 갈 거라고 했었다. . . 나는 형이 있길 바라는 걸까 없길 바라는 걸까. 근데 여행은 가지마라 제발. 나 때문에 기분 더러워서 여행 안 갔으면.

 

 

전정국.”

 

 

되게 교문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있어서 좀 어이가 없었다.

예진이 누나는 안보였다.

 

 

차는 어디 세워놨어?”

 

 

나는 왜 늘 말이 이렇게 나갈까.

 

 

우리 헤어졌어.”

 

 

. 좆됐다.

 

 

?”

시험은 잘 봤냐?”

……망했어. 형네 후배 못할 듯.”

 

 

숨이 막힌다. 형이 헤어진 게 내가 아니라 그쪽이라는 게. 심지어 형 표정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형을 모르겠다니.

 

 

. 이제 나랑 같이 학교 다니기 싫어졌어?”

?”

내 우산이나 내놔.”

 

 

우산? 그 말을 듣고 보니 형은 엄청 예쁘장한 우산을 쓰고 있었다. 땡땡이무늬에 끝단에 레이스 같은 게 덧대진 아이보리색 우산이었다. 묘하게 어울려서 몰랐네.

 

 

새 거 사줄게.”

그 우산이 좋아. 돌려줘.”

미안해. 잃어버렸어.”

어디서?”

그날 그냥 거기 두고 왔어. 그 우산 전부터 맘에 안 들었어.”

……아직 있을지도 몰라.”

 

 

형이 급하게 돌아섰다. 그 꼴이 너무 싫었다. 왜 또 이 타이밍에서 쓸데없는 고집이야. 해야 할 말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막연하고 슬픈 감정들을 준비하고 있는데. 라디오 DJ같은 짓 좀 하지 마봐.

형의 팔을 잡았다. 며칠 새 마른 것 같다.

 

 

 

그냥 버리라고!”

싫어!!”

 

 

나는 그렇게 소리 지르는 형을 처음 봤다. 내가 형을 귀여워하든 말든, 늘 어딘가 차분함을 가진 사람이었어서. 그렇게 격한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인지 몰랐어요. 그렇게 우는 형도, 그렇게 아프게 때리는 것도 난 처음 경험했다.

 

 

개새끼, 나쁜 새끼, 짜증나. 너 진짜 싫어. 너 존나 싫어!”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꾹꾹 짜내며 우는 사람인줄 알았으면, 날 것의 감정을 내뿜는 사람인줄 알았으면, 절대 울게 안했는데.

 

 

나 예진이 좋아했다고. 지금까지 만난 다른 애들이랑 달랐단 말이야.”

 

 

설마, 혹시 그날 우리를 보기라도 했던 걸까. 타이밍이 나빴을 수도 있지. 드럽게 나쁠 수도 있더라고 타이밍이란 게.

머리는 나쁜 방향으로만 굴러갔다. 심지어 헛바퀴를 굴러서 제대로 대처도 할 수 없었다.

 

 

형 내가 미안해. 내가 수습할게. 다 돌려놓을게.”

 

 

수능을 마친 수험생들과 부모님들, 친구들이 얽혀 있는 곳 한 복판에서 우리는 주목받고 있었다. 형이 그 시선들 사이에 놓여있는 게 싫었다. 내 가슴과 배를 마구 때리는 형을 꽉 안아서 멈추게 했다.

 

 

, 우선 저 쪽으로 좀 가서…….”

 

 

형이 다짜고짜 내 입술을 물었다.

내 양볼을 두 손바닥으로 꾹 눌러 고정한 채로, 콱 물어버렸다.

 

 

!”

 

 

피 맛이 날 때까지 아랫입술을 짓이기더니 뜯어대듯 떨어져나갔다. 사람들은 이젠 우리를 아주 미친놈들로 보고 있었다. 딱 맞았다. 형은 마치 제가 입술을 뜯긴 것처럼 씩씩대며 날 봤다. 나는 얼른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곧 윗입술도 뜯을 기세였다. 형 입술도 내 피로 범벅이었다.

 

 

너보다!”

…….”

 

 

형은 머리를 연신 넘기며 하늘과 땅을 연달아 봤다. 짧은 사이 한숨을 많이도 쉬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움직임 사이로 눈에 눈물이 한바가지 맺혔다.

 

 

. 할 수 있었는데.”

……?”

너보다 더 좋아할 수 있었는데.”

 

 

또 온통 빨개진 박지민이 온통 젖은 얼굴로 말했다.

눈물은 쏟아지며 우리 사이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조금 더 깊고 진한 농도로. 길고 긴 장마로 농축된 흙탕물이라도 좋다. 사실 딱 그 정도가 좋아.

 

 

 

 

 

 

 

 

 

 

 

 

fin

 

 

 

 

 

 

 

+

 

 

 

 

 

epilogue

 

 

 

 

 

솔직히 그 이후론 잘 기억이 안 난다. 입술을 물어뜯긴 것도 너무 충격이고 내 피가 묻은 입술로 한 말도 뭔 소린지 모르겠고 거기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우선 무작정 손목을 끌고 걷다가 아무 골목으로나 들어갔다. 그리곤 키스를 했다. 그게 내가 그 말을 이해하는 방법이었다. 형이 키스를 받아줬다. 그래서 난, ?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게 인생 두 번 째 키스였다. 형은 내가 처음이 아닌 것 같았지만.

 

 

둘 다 다리가 풀려 골목에 쭈그려 앉아서는, 형이 쏟아내는 얘기들을 듣고 들었다. 결론은 날 좋아한다는 거였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내가 만질 때, 닿을 때 너무 찌릿했다고. 좋아하기 싫어서.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좋아하는 게 무서웠는데 떨어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는 거다. 미쳤다. 내가 잘 못했네. 내가 등신이네. 난 계속 그런 추임새를 넣었던 것 같다.

형은 억울해 죽으려고 했다. 내가 폭탄 던져놓고 연락 한 번 없는 게 그렇게 서러웠다고. 키스해보니까 영 아니다 싶었나 생각했대. (수능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단다.) 예진이랑도 개같이 헤어져서 자긴 자퇴해야한다고. 나 외동아들인데 어떡할 거냐고. 이건 투정도 아니고 거의 날강도였다. 지가 나를 좋아한 것도 다 내 탓이란다. 그렇게 말하면 되게 틀린 말도 아니면서 내가 더 억울해졌다.

. 그 일회용 우산도 언젠가 내가 사준 거랬다. 3때 내가 처음 사준 거래. 미쳤나 진짜. 내가 그거가지고 청승을 얼마나 떨었는데. 집에 가면 그거부터 부셔버릴 거야.

그러고 있다 보니 부슬부슬 내리던 비도 그치고 형은 배가 고프다고 그랬다. 우린 비에 젖은 생쥐 꼴로 고기를 먹으러 갔다. 열심히 돼지갈비를 구워주다가 배가 찬 형의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아 물었다.

 

 

, 우리 여행 갈래?”

 

 

나는 늘 말이 이렇게 나갈까. . 나쁜 습관이다. 이건 고쳐야겠다.

형은 내가 좋아하는 마늘을 잔뜩 넣고 쌈을 싸서 야무지게 내 입을 막아버렸다. 근데 난 입이 좀 큰 편이어서 안 막아진다.

 

 

. 으이 어행 가가.”

 

 

쌈 속에 고기가 좀 많이 뜨겁다.

 

 

 

 

 

 

 

 

 

-

 

 

 

 

 

좀 약간 많이 정줄 놓고 쓴듯합니다...

개그물이에요. 아무말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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